이유와 이해의 스팩트럼

모든 행동이나 주장들에는 비교적 분명한 이유에서부터 불분명한 이유까지 ‘이유들의 스펙트럼’이 있다. 이 다양함을 ‘하나’로 환원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 말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환원 불가능한 빈자리를 용납하지 못하는 무능력 뿐. ‘이유’ 만큼이나 ‘이해’도 마찬가지이다. 보다 더 이해하고 있고, 덜 이해하고 있을 뿐, 절대적 몰이해는 없는 것이다. 양이나 수치로 환산하지 못하는 것들을 그냥 놓아두는 것이 힘든 이유는, 예측 불가능성에서 비롯되는 불안감 때문이다. 불안과 두려움을 기대와 설레임으로 전환시킬 수는 없을까? ‘삶’의 모든 국면을 진리의 현전이라 믿는다면, 더더욱 그 공백을 사랑해야 한다.

“실제의 그들은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모습과 같지 않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것. 이것은 신의 자기희생을 본받는 것이다.나 역시 스스로 상상하는 것과 다르다. 그것을 아는 것이 바로 용서이다.” – 시몬 베이유, <중력과 은총>, 23쪽

실제와 상상 사이의 차이, 그 차이가 공백을 이루고 있다. ‘신’을 전체인 우주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의 희생은 전체성을 포기하고 지속하는 개체화 운동이다. 전체 임에도 개체로 드러나는 것, 상상과 실제의 간극을 만들고-없애는 그 운동. 개체의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모든 우발성의 결과들(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고, 거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공백’에 대한 사랑이 곧 삶에 대한 사랑이고, 망상과 상상에 대한 용서가 곧 운명애인 셈이다.

Add a Comment Trackback

Add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