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

스피노자 세미나 발제문 중에서

모든 질문은 이미 하나의 ‘방향’ 안에 있다. 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 속에는 이미 실천 또는 운동의 방향이 정해져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진리를 멈춰선 것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세계가 단 한순간도 생산을 게을리 하지 않는 만큼 진리 역시 늘 스스로를 생산한다. ‘어떻게’라는 물음 속에 함축된 ‘실천’이란 생산하는 진리로서 철학적 활동을 말한다. 스피노자 사유에서 어떤 것을 안다고 하는 것, 즉 ‘적합한 인식’이란 ‘활동’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실제로 ‘활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활동’은 어디엔가 멈춰서 있는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진리를 생산하는 활동이 된다. 왜 진리를 생산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진리가 아닌 것들 속에서 살아가기 힘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비-진리(부적합한 인식들)가 지배하는 환경은 개체들의 자기보존을 어렵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는 늘 특정한 사태 속에서 ‘적합한 활동’을 고민하고, 그 사태에 ‘적합하게’ 활동하고자 노력한다. 따라서 우리는 철학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음으로써 사유의 사태성 밖으로 나가려는 부적합한 질문 방식을 버리고, 그것에 대해 ‘어떻게’라고 물음으로써 우리의 삶 속에서 작동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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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체가 곧 중생이다

어떤 개체라도 그것은 결코 분할 불가능한 단독자가 아니다. 모든 개체는 작은 신체들의 집합체이다. 따라서 모든 개체는 곧 중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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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가만히 생각해 보니, '능력'이라는 건 조낸 바쁜 와중에도 내가 뭘하고 있는지 아는 것이다. 그걸 모르면 그냥 조낸 바쁘기만 한거다. 스피노자나 니체라면 그런식으로 사는 삶을 '노예적'이라고 불렀을게다. 그들에게 '인식'이란 '원인에 대한 이해'였고, '원인'은 '효과를 산출하는 운동'이다. 다시 말해 효과(조낸 바쁨)를 산출하는 운동(일)이 뭔지 모르면(인식불가) 이유도 모른채 몸도 마음도 피곤해지는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노예'는 그렇게 뭘 모르고 일을 저지를 때 노예가 된다. 아 요즘 쫌 바쁜데 덜 피곤한걸 보면 해방의 날이 머지않은 걸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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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교수직 거절 답장과 헤겔

스피노자의 교수직 거절 답장

“교수직을 맡는 것이 나의 소망이었더라면, 저는 다른 자리가 아닌 팔츠의 영주 전하께서 당신을 통해 제게 제의한 바로 그 교수직을 맡았을 것입니다. 자비로운 영주께서도 황송하게도 제게 허락해 주는 철학의 자유 때문에라도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공적인 자리를 맡는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 본 적이 없기에 이 훌륭한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철학함의 자유가 어떠한 한계에 머물러야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공인된 교회를 혼란시키려 든다는 인상을 불러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불화란 종교에 대한 내적인 사랑에서 생기는 것 보다는 오히려 인간 감정의 상이함 또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왜곡하고 단죄하는-이렇게 얘기해도 된다면- 대립의 정신에서 생겨나옵니다. 저는 이미 저의 고독한 사생활을 통해서도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처럼 영광된 자리에 오를 경우에는 얼마나 더한 일들을 우려해야 하겠습니까? 따라서 진실로 존경하는 선생님, 당신께서는 제가 어떤 더 나은 삶에 대한 전망 때문에 거절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방해 받지 않는 생활에 대한 애정  때문에-그러한 생활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기 위해- 제가 공식적인 강의를 거절하였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헤겔은?

1816년 7월 30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총장은 당시 뉘른베르크 김나지움의 교장이던 헤겔에게 정교수직을 제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는 자신의 제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설립 이래 처음으로 선생님 같은 분을 철학자로 모시게 됩니다. 선생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전에 스피노자를 초빙하려 했던 일은 무위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중략) 그(헤겔)는 "대학에서의 연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총장의 제안을 수락한다. 그는 다만 제시된 것보다 좀더 나은 처우를 해 줄 것, 무상으로 숙소를 마련해 줄 것, 이사 비용을 지불해 줄 것 등을 요구했다.
(『헤겔 또는 스피노자』, 마슈레, 진태원 역)

헤겔이 그의 사유에서, 그리고 삶에서 국가 또는 학교와 가까웠던 그 만큼 스피노자는 그것들과 거리를 둔다. 그리고 그 거리만큼 두 사유의 거리는 멀다. 또 그 거리만큼 두 사유는 '공식화'에 대한 입장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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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사는 법

나는 생계가 막연한 에르난데스에게 일자리를 구해 주고 싶었다. 스페인에서 시인은 직업을 얻기 어려웠다. 마침 외무부의 고위 관료로 일하는 한 자작이 사정을 듣고, 에르난데스의 시를 읽고 감탄했는데 기꺼이 도와주겠으니 원하는 직책만 알아 오라고 말했다. 나는 들뜬 마음으로 그 소식을 전했다.

"에르난데스, 드디어 직업이 생겼어. 자작이 자네에게 한자리 주겠대. 이제 아주 높은 자리에 앉게 된 거야. 원하는 자리가 뭔지 말해 봐. 그래야 임명을 하지."

에르난데스는 생각에 잠겼다. 때 이른 주름살이 깊이 파인 얼굴에 근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몇 시간이 지난 오후에야 그는 대답을 주었다. 인생 문제의 해답을 찾은 사람처럼 두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여기 마드리드 근처에서 염소 떼를 키울 수 있게 해 줄 수는 없을까?"

(파블로 네루다,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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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생활, 이해불가능한 타인

1.
일을 하는 동안엔 닥쳐오는 풍파들이 괴롭게 느껴진다. 특히나 이번 주엔 여기저기 전화할 일이 많았다. 온갖 불친절, 내 자존감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그야 말로 '타자'들과 관계해야 할 땐 더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이 하기 싫었던 적은 없다. 한번 더 움직이고, 한번 더 말하고, 한 줄 더 글을 쓰는 동안 내 존재의 강밀도는 더욱 커진다. 다시말해 그러는 동안 나는 '충전'된다. 내가 살아가고 싶은 삶이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활동성이 커질수록 충전율이 높아지고, 더불어 그 활동을 통해 타인들과의 공통성(보편성이 아니다)이 생성된다. 이런 형태로 삶이 구성되기 때문에 이미 '일'은 정치경제학적 의미의 '노동'이길 멈춘다. 그리고 '일'이 '노동'이길 멈춘 그것과 마찬가지로, 딱 그렇게, 타인은 이해불가능한 대상적 개체이길 멈춘다.

2.
사르트르 강의를 들었다. "타인은 지옥이다". 사르트르의 저 유명한 명제는 타인이 이해불가능한 대상으로 남아있는 동안만, 노동이 가치산출의 원천으로 남아있는 동안에만 맞는 말이다. 그 동안 타인은 지옥이고, 노동은 지옥이다.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타자화'의 매커니즘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한 '벗어남'을 '탈주'라고 한다면, 보편을 관철시키려는 것은 지옥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외부를 내부화(~에 대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외부와 동료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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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씨발 국가보안법

공안사건이 터졌다.


"헤겔은 어디에선가, 모든 거대한 세계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은 말하자면 두 번 나타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소극으로."


맑스가 150여년 전에 한 저 말이 이렇게 딱 들어맞는 경우가 또 있을까?

지금 상황은 진지하게 고려해야할 성찰의 대상도, 비장하게 맞서야할 억압적 상황도 아니다. 그저 센스없고, 박자감각 떨어지는 우익들이 만들어낸 개그쇼일 뿐이다. 이 넌더리 나는 촌스러움이 짜증스럽다. 잡혀간 사람들에게 마음이 쓰이는 것은 그들이 겪을 사상적인 고통과 고난 때문이 아니다. 이명박과 복고풍을 고집하는 경찰들이 만들어낸 코메디쇼에 강제로 출연하면서 느낄 그 창피함이 안쓰럽다.


아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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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진화

목적론은 세계를 어떤 '목적' 아래로 귀속시킨다. 예컨데, 사회는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발전도상 속에 있다는 식의 언명이 그렇다. 이런 식의 세계구축술은, 내적원인이 있고 이것이 발현되는 것으로 세계를 설명한다. '내적원인'이라는 말 속에는 현상과 목적 사이의 묘한 전도가 자리잡고 있다. '목적'은 사실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저편의 것임에도, 삶의 궤도 속에서 자신을 설명해내기엔 목적론 만큼 편리한 것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저편의 것을 통해 지금-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규정하기 위해 '목적'과 접합될 만한 내적인 요소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곤, 스스로 '목적' 아래 귀속되어 있다는 점은 망각되고, 그것이 스스로의 원인이라는 기묘한 전도 속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기계론은 개체를 철저히 '환경'에 종속시킨다. 이를테면, 자연선택설, 우승열패와 같은 것들이 기계론을 잘 보여준다. 세계를 작동하는 원리가 있는데 그것이 우등한 개체를 살아남도록 하고, 열등한 개체를 도태시킨다는 것이다. 진화는 그 개체가 속한 환경에 따라서 결정된다. 여기서 개체는 한없이 왜소해진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허무주의는 여기에서 자라나온다. 모든 변화의 노력을 '시기상조'로, 창조적 행위를 '무의미'로 규정하는 동안에 삶은 끊임없이 깎여나간다. 개체의 창조성을 갉아먹으며 이행의 운동을 뒤에서 잡아끈다는 점에 기계론은 목적론 보다 훨씬 강한 부정성을 갖는다.

이행의 원리를 설명하는 위의 두가지 입장이 원하는 것은 어떤 초월에의 의존, 삶의 약동으로부터의 도피이다. 따라서 저 두가지 입장의 거부는 그것이 사실인가, 거짓인가라는 구도에서 다뤄져야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과연 유용한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구도에서 다뤄져야 한다. 왜냐하면 저것들에 대한 '거부'가 삶의 조건, 긍정적 진행의 시작점을 이루기 때문이다.

삶의 진행은, 삶에 대한 설명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부단히 갱신되는 창의성에 의해 가능하다. 심지어, 목적론과 기계론을 통해 삶의 진행의 멈추고 그것을 설명하려는 노력조차, 그리고 그 설명을 가능케하는 용어들 조차 약동하는 창조의 행위 때문에 일어날 수 있다. 저 앞엔 아무것도 없다. 무엇인가 있다면 그것은 '현재'의 바로 다음에 이어붙어오는 창의력의 산물 뿐이다. 우리의 진화는 목적에의 부합을 욕망하지 않는다. 또 원리의 선택에 의한 것도 아니다. 진화는 '그때'를 갱신하는 창조성의 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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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끙끙

1.
...경우에 따라 '건방'질 때도 간혹 있지만 대체로 '소심'한 편이라, 속으로 끙끙거릴 때가 많다.
이런 성격은 어떻게 고쳐야 하지...

2.
2008 펜타포트 이후로 일렉트로니카, 테크노, 씬스팝 요런 음악들이 좋아졌다. 음악에 관한한 가리지 않고 게걸스럽게 들어대는 편인데, 그 와중에 당췌 소화할 수 없는 3대 장르가 있었으니, 다름아니라 '일렉트로니카', '힙합', '한국주류가요'가 그것이다. '한국주류가요'에도 온갖 종류가 많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가요'의 범주에 묶이는 것들 사이의 차이를 잘 모르겠다. 이를테면, 이승환이나 서태지나, 원더걸스나 소녀시대나 다 그게 그거 같다.
그러던 내가 '일렉트로니카'가 좋아졌다니, 참 희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사가 별로 없다는 점, 음들의 다채로운 향연이 펼쳐진다는 점, 현실에서 이탈감을 느끼게 한다는 점, 이런 점이 '클래식'과 비슷하다면 비슷하달까.

3.
여튼 '성격'에 대한 불만과 최근 좋아진 음악사이에 묘한 연관이 있다. 요는 요즘 꽤나 힘들다는 것. 그래서 이 '현실'에 존재하는 비루한 성격으로부터 '이탈감'을 느끼고 싶다는 이야기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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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記

이런...

내일 뭐 올리지...
까먹고 있었다........................................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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