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나는 이것을 생각하며 낙랑을 나서 비 내리는 포도를 걷는다. 낙랑의 이군만 해도 서로 친구라고 부르는 사이다. 그러나 그가 그의 집으로 갔나 보다고 할 때, 나는 그의 집안을 상상하기에 너무나 막연하다. 그의 어머니는 어떤 부인이요, 아버지는 어떤 양반이요, 대체 이군은 어디서 났으며 소학교는 어디를 다녔으며 어릴 때의 그는 어떤 아이였더랬나? 나는 깜깜이다. 그가 만일 친상을 당했다 하더라도 나는 어떤 노인이 죽은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막연할 것이다. 그의 조상에는 어떤 사람이 났었나, 그의 어린애들은 어떻게 생긴 아이들인가 모두 깜깜하다.
‘이러고도 친구 간인가? 친구라 할 수 있는 것인가?’
생각이 들어간다. 생각해보면 오늘 만나본 중앙일보사의 모든 사람들, 또 지금부터 만났으면 하는 구보나 이상이나 월파나 일석이나 모두 안 그런 친구는 하나도 없지 않은가?
모두 한 신문사에 있었으니깐 알았고, 한 학교에 있으니깐 알았고, 한 구인회원이니깐 안 것뿐이 아닌가? 직업적으로, 사무적으로, 자주 만나니까 인사하고 자주 인사하니까 손도 잡고 흔들게 되고 하는 것뿐이지 더 무슨 애틋한, 그리워해야 할 인연이나 정분이 어데 있단 말인가? ‘친구 간에 어쩌고어쩌고……’ 하는 말이 모두 쑥스럽지 않은가? 그러자 나는 몇 어렸을 때 친구 생각이 난다.
용기, 흥봉이, 학순이, 봉성이……. 그들은 정말 친구라 할 수 있을까? 어려서 빨가벗고 한 개울에서 헤엄을 치고 자랐다. 그래서 용기 다리에는 무슨 흠집이 있고 봉성이 잔등에는 기미가 몇인 것까지도 안다. 학순이는 대운동회 때, 나와 이인삼각의 짝이 되어 일등을 탄 다음부터 더 친하게 놀았다.
— 이태준, <<이태준 단편선 까마귀>>, <장마>, 74~75쪽
23살 때였나, 데모 그만두고 같이 활동했던 ‘친구’들과는 멀어지고, 그때까지 그냥 인사나 하고 지내던 과선배들과 ‘친구’가 되었을 때, 문득 나한테 ‘친구’가 있긴 있나 싶었다. ‘둘도 없는 죽마고우’ 같은 민망한 말을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친구’는 전혀없었고, 그나마 그에 가장 가까운 축에 드는 게 감자였다. 그리고, ‘죽마고우’는 아니지만 당시에 아주아주 친하게 지내던 찐이나 양수도 강도로 치자면 감자와 비등비등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꼽아보고, 생각해 봐도 내 모든 걸 알고 있고, 전해오는 미담에나 등장할 법한 그런 ‘친구’라는 게 전혀 떠오르지 않았고, 그 때문에 일주일 정도 심한 외로움에 시달렸다.
도대체 왜 그런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
<장마>의 저 부분을 읽으면서 그 때 생각이 났다. 아마 그 시절에 읽었더라면 외로움을 곱배기로 증폭시켰을테지만, 이 좋은 시절에 읽고 있자니 얼마나 재미있는지…….
주인공 ‘이군’(이태준 님하)이 소설 말미에 아내가 좋아하는 ‘도야지족’, 그것도 가게에서 가장 큰 걸 골라 사는 것처럼, 어릴 적 친구 학선이에게 자신이 쓴 소설책을 부쳐주는 것처럼, ‘미담’은 언제나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친구’는 어디에도 없다. 친구들 사이를 오가는 미담들이 있을 뿐.
(단, 미담이 언제나 ‘좋은 소리’만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자.)
참 훈훈한 1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