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01029

가을 몸

- 박노해

비어가는 들녘이 보이는
가을 언덕에 홀로 앉아
빈 몸에 맑은 별을 받는다

이 몸 안에
무엇이 익어 가느라
이리 아픈가

이 몸 안에
무엇이 비워 가느라
이리 쓸쓸한가

이 몸 안에
무엇이 태어나느라
이리 몸부림인가

가을 나무들은 제 몸을 열어
지상의 식구들에게 열매를 떨구고
억새 바람은 가자 가자
여윈 어깨를 떠미는데

가을이 물들어서
빛바래 가는 이 몸에
무슨 빛 하나 깨어나느라
이리 아픈가
이리 슬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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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의 나에게, 친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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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1024 릴케-니체

소년

- 릴케

사나운 말을 타고
밤을 뚫고 달리는 사람이고 싶다,
질주하는 바람 속에
헝크러진 머리카락처럼 횃불 펄럭이며,
당당한 모습, 높이 솟은 깃발되어
뱃머리에 서듯 앞장서련다.
쉼 없이 빛나는 황금투구를 쓴
검은 모습으로 가리라. 뒤로는
나와 똑같은 열 명의 어둠의 장정이 따르리라,
유리처럼 맑기도, 어둡기도, 또 늙고 눈먼 모습들이다.
나와 똑같이 불안한 투구를 쓴 열 명의 장정들이다.
한 사나이 내 옆에 붙어, 달리는 우리의 공간을 향해
나팔을 분다, 반짝이며 외쳐대는 나팔을.
우리에게 검은 고독을 불어주고,
그 사이로 우리는 짧은 꿈결처럼 돌진한다.
그러면 집들은 우리 뒤에서 무릎을 꿇고
골목들은 우리를 향해 황급히 허리를 구부린다.
도망치던 광장들은 곧 우리 손아귀에 잡히고
우리가 탄 말들은 빗줄기처럼 솨솨 소리를 낸다.

—————————————–
평화와 권태를 혼동하면 안 된다. 어떤 빠른 속도, 강한 긴장과 결부된 평화도 있는 법이니까. 자의식의 과잉 상태가 평화와 거리가 먼 이유는 늘어진 속도와 긴장 속에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차라리 권태에 가깝다. 잔뜩 요동치고 있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 ‘밤을 뚫고 달리는’ 사람이고 싶다.

‘소년’은 ‘~하고 싶다’의 형식으로, 의식 수준에서만 욕망을 표현한다. 어른이라면, ‘싶다’는 표현이 비집고 나올 공백을 지우면서 물결표시 속에서 이미 무언가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미 ‘싶다’의 표현이 되어 있을 것이다.
연속으로 두번이나 사용한 ‘것이다’ 속에 내가 있구나!

“나의 사랑과 희망을 두고 간청하노니, 네 영혼 속에 있는 영웅들을 내쫓지 말라! 너의 높디높은 희망을 신성하게 유지하라!”(차라투스트라 68쪽)

—————————————–

  너는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 그 때문에 아직도 자유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다. 자유를 향한 너의 추구가 너로 하여금 밤을 지새게 했으며 긴장을 늦추지 않도록 만들었다.
  너는 사방이 확 트인 산정에 이르기를 소망하고 있으며, 너의 영혼은 별을 갈망하고 있다. 심지어 너의 저열한 충동조차 자유를 갈망하고 있다.
  너의 들개들은 자유를 원한다. 모든 감옥의 문을 열어젖혀뜨리려고 너의 정신이 애쓰고 있을 때 기쁨에 넘친 그들은 지하실에서 짖어댄다.
  너는 아직도 자유를 꿈꾸고 있는 수인에 불과하다. 아, 이러한 수인의 영혼은 영리해진다. 교활해지기도 하며 천해지기도 한다.
  정신의 해방을 쟁취한 자는 이제 자기 자신을 정화해야 한다. 아직도 허다한 감옥과 곰팡이가 그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의 눈 또한 깨끗해져야 한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산허리에 있는 나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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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101011

‘친구?’
  나는 이것을 생각하며 낙랑을 나서 비 내리는 포도를 걷는다. 낙랑의 이군만 해도 서로 친구라고 부르는 사이다. 그러나 그가 그의 집으로 갔나 보다고 할 때, 나는 그의 집안을 상상하기에 너무나 막연하다. 그의 어머니는 어떤 부인이요, 아버지는 어떤 양반이요, 대체 이군은 어디서 났으며 소학교는 어디를 다녔으며 어릴 때의 그는 어떤 아이였더랬나? 나는 깜깜이다. 그가 만일 친상을 당했다 하더라도 나는 어떤 노인이 죽은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막연할 것이다. 그의 조상에는 어떤 사람이 났었나, 그의 어린애들은 어떻게 생긴 아이들인가 모두 깜깜하다.

  ‘이러고도 친구 간인가? 친구라 할 수 있는 것인가?’

  생각이 들어간다. 생각해보면 오늘 만나본 중앙일보사의 모든 사람들, 또 지금부터 만났으면 하는 구보나 이상이나 월파나 일석이나 모두 안 그런 친구는 하나도 없지 않은가?

  모두 한 신문사에 있었으니깐 알았고, 한 학교에 있으니깐 알았고, 한 구인회원이니깐 안 것뿐이 아닌가? 직업적으로, 사무적으로, 자주 만나니까 인사하고 자주 인사하니까 손도 잡고 흔들게 되고 하는 것뿐이지 더 무슨 애틋한, 그리워해야 할 인연이나 정분이 어데 있단 말인가? ‘친구 간에 어쩌고어쩌고……’ 하는 말이 모두 쑥스럽지 않은가? 그러자 나는 몇 어렸을 때 친구 생각이 난다.

  용기, 흥봉이, 학순이, 봉성이……. 그들은 정말 친구라 할 수 있을까? 어려서 빨가벗고 한 개울에서 헤엄을 치고 자랐다. 그래서 용기 다리에는 무슨 흠집이 있고 봉성이 잔등에는 기미가 몇인 것까지도 안다. 학순이는 대운동회 때, 나와 이인삼각의 짝이 되어 일등을 탄 다음부터 더 친하게 놀았다.


— 이태준, <<이태준 단편선 까마귀>>, <장마>, 74~75쪽

23살 때였나, 데모 그만두고 같이 활동했던 ‘친구’들과는 멀어지고, 그때까지 그냥 인사나 하고 지내던 과선배들과 ‘친구’가 되었을 때, 문득 나한테 ‘친구’가 있긴 있나 싶었다. ‘둘도 없는 죽마고우’ 같은 민망한 말을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친구’는 전혀없었고, 그나마 그에 가장 가까운 축에 드는 게 감자였다. 그리고, ‘죽마고우’는 아니지만 당시에 아주아주 친하게 지내던 찐이나 양수도 강도로 치자면 감자와 비등비등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꼽아보고, 생각해 봐도 내 모든 걸 알고 있고, 전해오는 미담에나 등장할 법한 그런 ‘친구’라는 게 전혀 떠오르지 않았고, 그 때문에 일주일 정도 심한 외로움에 시달렸다.
도대체 왜 그런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

<장마>의 저 부분을 읽으면서 그 때 생각이 났다. 아마 그 시절에 읽었더라면 외로움을 곱배기로 증폭시켰을테지만, 이 좋은 시절에 읽고 있자니 얼마나 재미있는지…….

주인공 ‘이군’(이태준 님하)이 소설 말미에 아내가 좋아하는 ‘도야지족’, 그것도 가게에서 가장 큰 걸 골라 사는 것처럼, 어릴 적 친구 학선이에게 자신이 쓴 소설책을 부쳐주는 것처럼, ‘미담’은 언제나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친구’는 어디에도 없다. 친구들 사이를 오가는 미담들이 있을 뿐.
(단, 미담이 언제나 ‘좋은 소리’만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자.)
참 훈훈한 1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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