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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밀알이 썩어

- 진은영

한 알의 밀알로 썩어
거대한 밀밭을 꿈꾸는 사람들

나는 하나의 밀알로 썩어
세상의 모든 바람이 취기로 몰려오는
한 방울 향기
아득한 밀주
아무런 후일담도 준비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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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부

존재의 절대적 평등을 믿고, 그 믿음대로 살기.

격랑 속에서도 파도의 궤적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모든 두려움 가운데, 열정이 사라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 하기.

분노와 질투로 몸을 망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설혹 속는 한이 있어도 ‘지금’ 우정을 의심하지 말기.

삶의 단일성을 신봉하기, 그 신념을 최대한의 사람들과 나누기.

이것들과 더불어 말할 수 있는 수많은 ‘-하기’들.

행복은 이 모든 것을 지킨 후에 오는 것이 아니라
‘-하기’의 운동 속에 있다는 것을 명심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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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1009

청춘

- R.M. 릴케

별들로부터 들려오는 듯한 노랫소리가
나를 멀리 시골로 실어간다.
그것은 마치 행복한 시골 사람이 멀리 떨어진
포도나무 덩굴로 휘감긴 술집에
있는 것 같다.

노래는 내가 가는 길에 떠다닌다.
노래는 나를 평온하게 한다.
나는 깊은 정원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알게 된다, 모든 꽃들이 그와 같은 기적을
조용히 참으면서 기다린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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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1009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29

- 이성복

이렇게 또 헛된 희망은 밤이 되면 젖은 빨래처럼 나부끼고 머리털이 곤두서도록 잠은 오지 않는다 머리맡에는 히말라야 기슭에서 건너온 진흙으로 만든 부처, 그리고 대서양 에트레타 바닷가에서 주워온 해골 닮은 돌, 오, 살을 떠낸 물고기 뼈 같은 잠, 너무 가벼워 내 눈엔 앉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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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끼고, 시달리는 상태로 잠자리에 든 내 모습. “너무 가벼워 내 눈엔 앉지” 않고, 눈은 가렵기만 하다.
“머리맡에는” <에티카>와 <법성게>를 놓고, 자리에 들기 전에 읽은 구절들을 떠올리면서 마음을 잡아 보려고 노력하지만, 잠은 “너무 가벼워 내 눈엔 앉지 않는다”.

<에티카>나 <법성게>의 약발이 떨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약을 오용하는 것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사람이든, 책이든 의존하지 말고 그것을 통해 자기를 봐야하는데, 마치 두통약 먹듯 삼키기만 했던 것은 아닐까?

‘현자는 눈 덮힌 산에서 먹을 수 있는 것들의 목록을 작성하는 사람’이라는 니체의 말을 빌어, 번뇌와 괴로움 속에서도 배울 것들의 목록을 작성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진통의 잔여물들이 마음 속에 남아있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들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는 항체들의 힘이 강해졌다는 것도 생생하게 느끼고 있다.

우울한 시, 슬픈 정념을 말하는 시에서도 배울 것을 찾아보자. 그러면 어떤 것들 듣고, 읽어도 거기에 휘말리지 않고 (마음을 보는) 더 투명한 렌즈를 얻을 수 있으리라. 투명하게 자길 볼 수록 더 유연한 신체를 갖게 되지 않을까?

“너무 가벼운” 잠과도 변용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싫은 것들의 목록을 줄여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깨에 앉은 만년설을 녹이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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