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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평전 : 즉흥성, 추상화

1권 <당건설을 향하여>는 대학교 다니면서 읽었고, 2권을 얼마 전에 다 읽었다. 사실 가장 궁금했던 것은 이제 막 읽기 시작한 3권이었다. 대개의 러시아 혁명사가 볼셰비키의 권력장악 근처에서 끝나기 때문에(또, 거기까지만 보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1917년 이후 레닌의 사망, 트로츠키-스탈린의 권력투쟁까지는 공백에 가깝다. 스탈린 집권 후 얼어붙은 러시아 상황은 2차 세계대전 관련 이야기나,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알 수 있으니, 1917~1930 정도의 시기는 그야말로 ‘구멍’이다.

펼치자마자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10월 혁명 이후 관료가 부족한 볼셰비키들, 레닌이 어떤 방식으로 관료를 채용했는지에 관한 이야기인데…

나는 멘진스키[재무 위원] 옆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는 별 뜻 없이 내 경력을 묻다가 내 전공이 궁금하다고 했다. 나는… 런던대학교에서 주로 금융을 공부했다고 말했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멘진스키가 벌떡 일어서며 한 마디 했다. “당신이 국립은행 총재를 하면 되겠네.

(중략)

멘진스키 자신은 무슨 자격으로 재무 인민위원이 됐는가? “그가 전에 프랑스 은행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 토니 클리프, [레닌 평전] 3권 <포위당한 혁명>, 20쪽

어쩌면 초기의 이러한 ‘즉흑성’이 ‘혁명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수도없이 발표된 ‘포고령’에 대해 레닌은 이렇게 말한다.

포고령은 대중적 실천 활동을 요구하는 지침입니다. 그 점이 중요합니다. 이 포고령들에 쓸모없는 것, 실제로는 실행될 수 없는 조항이 많다고 칩시다. 그러나 실천적 행동을 위한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중략)… 문제를 이런 식으로 다룬다면 우리가 공포하는 법률, 명령, 조례로 많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포고령은 무슨 일이 있어도 즉시 실행해야 하는 절대적 명령이 아닙니다.
- 같은 책 19쪽

중요한 것은 ‘적혀있는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나게) ‘반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포고령’과는 정반대로 해도 된다. 거기에 적힌 ‘실천적 지침’에 합당한지, 문제를 ‘이런 식’으로 다루고 있는지가 훨씬 중요한 것이니까. 그런 점에서 보자면, ‘추상화’ 하는 능력은 어떤 ‘실행’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능력이다. 그 능력이 공통의 ‘리듬’을 창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니까. 그래서… ‘공부’해야 한다. 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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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와 이해의 스팩트럼

모든 행동이나 주장들에는 비교적 분명한 이유에서부터 불분명한 이유까지 ‘이유들의 스펙트럼’이 있다. 이 다양함을 ‘하나’로 환원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 말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환원 불가능한 빈자리를 용납하지 못하는 무능력 뿐. ‘이유’ 만큼이나 ‘이해’도 마찬가지이다. 보다 더 이해하고 있고, 덜 이해하고 있을 뿐, 절대적 몰이해는 없는 것이다. 양이나 수치로 환산하지 못하는 것들을 그냥 놓아두는 것이 힘든 이유는, 예측 불가능성에서 비롯되는 불안감 때문이다. 불안과 두려움을 기대와 설레임으로 전환시킬 수는 없을까? ‘삶’의 모든 국면을 진리의 현전이라 믿는다면, 더더욱 그 공백을 사랑해야 한다.

“실제의 그들은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모습과 같지 않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것. 이것은 신의 자기희생을 본받는 것이다.나 역시 스스로 상상하는 것과 다르다. 그것을 아는 것이 바로 용서이다.” – 시몬 베이유, <중력과 은총>, 23쪽

실제와 상상 사이의 차이, 그 차이가 공백을 이루고 있다. ‘신’을 전체인 우주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의 희생은 전체성을 포기하고 지속하는 개체화 운동이다. 전체 임에도 개체로 드러나는 것, 상상과 실제의 간극을 만들고-없애는 그 운동. 개체의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모든 우발성의 결과들(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고, 거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공백’에 대한 사랑이 곧 삶에 대한 사랑이고, 망상과 상상에 대한 용서가 곧 운명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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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와 여기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음악을 들을 때, 좋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 가슴이 두근거린다. 책이나 음악 이야기들은 모두 어딘가에서 일어난 일이고, 어떤 것에 담겨져 전해지는 것들이다. 이렇게 전해지는 것들이 듣고, 보고, 말하는 신체에 직접적인 변화(두근거림)를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그것들이 당장 느껴지는 직접적인 변화(두근거림) 너머의 변화를 보여주고, 들려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담고서 현시하지 못하는 음악과 책과 이야기는 두근거림을 주지 못한다. 당장의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 너머의 변화를 어떻게 일으킬 수 있을까.

‘너머’는 어떤 벽 ‘너머’, 어떤 경계 ‘너머’이다. 참 싫은 것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아프고, 그것을 없애버리고 싶어할 때, 신체능력의 벽, 정서적 수용력의 경계가 실존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 벽과 경계의 실존이 희망적인 이유는 그것들의 실존이 표현하고 있는 ‘너머’ 때문이다. ‘벽’이 있는 곳에 너머가 있다. 두근거리게 만드는 문장들, 음악들, 이야기들은 그 벽들을 무시로 뛰어 넘어 ‘여기’로 온 것들이다. 그것들과의 만남이 두근거리는 이유가 밝혀졌다! ‘너머’에서 온 것들을 직접 만났다는 것이 ‘너머’와 ‘여기’가 늘 통하고 있음을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쉬지 않고 벽을 만들고, 그 벽을 쉬지 않고 부수고 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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