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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이 아니라 '이행'

어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가능할까? 해결의 의미가 어떤 문제를 잘 풀어서 문제없는 상태로 만든다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문제'를 전제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런데 '문제'가 이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을 '없음'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다. 문제를 푸는 것이 과연 문제를 '없애'는 것과 동일한 의미일까? 오히려 문제는 '있음'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해결'이 아니라 '이행'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문제를 문제로 두고 떠나는 방식이 아니다. '문제'가 서있는 조건, 배치를 전환하는 문제이다. 어떤 문제가 다가올 때 그 문제를 그 문제가 전제하고 있는 규칙 위에서 바라보면 그것은 '문제'가 된다. 하지만 다른 +차원으로 그 문제를 옮겨 온다면 그것은 사실 문제가 아니었다. 전혀 다른 작동의 방식을 갖는 고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돈이 없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은 자본주의의 규칙 위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이다. 이것을 전혀 다른 삶의 방식 위에 올려놓고 보면 그 문제는 문제가 아니게 된다. 그렇게 되면 '돈' 자체의 의미도 달리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이행이 아닐까? 즉 내가 서있는 위치를 다르게 배치하는 것. 그래서 삶 자체가 변화를 거듭하는 것.
이런 점에서 '문제'는 늘 삶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이행'은 삶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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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맑스주의 : '튼튼한' '우정'의 책

꿈 이야기

명동 교보문고에서 맑스를 만났다. 무엇인가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한 나는 무수하게 쌓여있는 질문더미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 무수하게 쌓여있는 질문은 3년여 간의 공백 끝에 다 날아갔는지 내용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당장 물을 수 있는 것을 물었다.

“좋은 책이란 어떤 책이죠?”

고작 저 질문을 하려고 나의 가슴은 그리도 뛰었단 말인가 하고 후회하고 있을 무렵 돌아오는 답이 질문이 가진 본래의 빛을 발하게 해 주었다.

“논리적 전개는 면도칼 하나 들어갈 틈이 없이 치밀하면서도 다 읽고 난 후에는 비판이든, 투덜거림이든, 열광적 동의든 할 수 있게 만드는 책이 좋은 책이라네. 그래서 그 기억 때문에 언제고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책이 좋은 책이지.”

험악한 인상과는 달리 다정하게 설명해준 맑스의 말을 곱씹으며 돌아서는 데, 인문학 코너 한켠에 들뢰즈가 있었다. 그에게 맑스의 말을 전하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의 답.

“대체로 동의해. 하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렇기 때문에 언제 돌아와도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튼튼한 책이어야 한다는 점이야!”

명동엔 교보문고가 없다. 그리고 맑스와 들뢰즈가 서점에서 시간 죽이고 있을 리도 없다. 그렇다. 이것은 꿈 이야기이다. 가슴 뛰는 그 꿈을 꾸고 일어난 새벽, 책상 앞에 앉아서 꿈속의 장면들, 대화들, 그들의 표정들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아이돌에 정신 팔린 10대 소년 마냥 그런 꿈을 꾸었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였거니와, 다른 사람도 있었을 텐데 왜 하필 그 사람들 이었을까 생각해보았다. 그 때 번뜩 머리를 스치는 생각. 그들은 자랑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맑스님의 책은 논리적인 전개가 치밀하면서도 감수성이 어찌나 풍부하신지 읽는 이의 반작용까지 고려하셨고, 들뢰즈님의 책은 치밀하면서도 유행을 쫓지 않고 만들어서 세월이 흘러도 튼튼하게 살아있을 것이다.(처음엔 물리적으로 튼튼한 책이라고 생각하였으나, 해석의 키워드가 “자랑”으로 바뀌자 장점이 극대화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그런 꿈을 꾸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지금부터 할 이야기의 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미-래의 맑스주의”라는 책

"미(未)-래(來)의 맑스주의"는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다. 제목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지금까지 조심스럽게 “맑스를 좋아한다”라고 말할 때 나의 그 “맑스”는 언제의 맑스였을까? 맑스를 읽을 때 나는 습관적으로 19세기라는 시대적 조건을 고려해왔다. 10여년 넘게 배워온 제도교육의 성과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어떤 책은 그 시대의 조건을 고려하며 읽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그 시대에 재(앙)이었던 사상을 한줌의 재로 만들어 다루기 쉽게 만들었던 그 이념을 알게 모르게 몸에 익힌 것이다. 두 번째 습관은 앞의 것보다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뛰어날 것도 없는 것이다. 현재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갔다는 데 의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다음엔? 이 경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책에서 말하는 바를 고지식하게 받아들여서 현실을 재단(裁斷)해 버린다는 점이다. 과거의 책에 ‘지금’의 현실을 끼워 맞추는 것. 이렇게 되면 사상은 “프로크라스테스의 침대”가 되어 현실의 다리를 잘라버린다.

“미-래의 맑스주의”라는 제목으로부터 받은 범상치 않은 느낌의 근원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사상’이라는 말을 통해 ‘사상’을 ‘과거’에 가두는 습관, ‘현실적 적용’이라는 전략을 통해 ‘현실’을 사상에 끼워 맞추려는 습관, 이 두가지 습관을 한꺼번에 비판하는 말이기 때문에 그것은 범상치 않다.

역사유물론, 노동가치설, 계급과 적대의 문제를 각각의 한 단원으로 다룬다. 각 단원에서 주목해할 점들은 맑스주의라는 이름으로 전개되어 왔던 과거사의 정리, 맑스의 저작 자체에서 읽혀지는 내용의 요약이 아니다. 저 익숙한 개념들을 책에서 다루는 방법은 외부와 접촉시키는 방법이다. “맑스는 자신과 다른 생각, 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을 만남으로써 이전의 자신과 다른 사람, 다른 사상가가 된다.”(270쪽)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맑스주의를 맑스주의의 외부와 접촉시킴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맑스주의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맑스주의를 탈영토화 시키고, 재영토화 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서만 머무를 것인가? 역사유물론이 외부를 통해 사유하고, 특정한 조건들을 고려하는 태도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진경’의 맑스를 다시 탈영토화하고 재영토화 하는 과정을 “반복”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이진경이 말하는 “미-래의 맑스주의”가 아닐까?


꼬뮌주의와 꼬뮌

“역사를 하나의 법칙으로 몰아넣고, 혁명을 하나의 단일한 이미지로 포섭하는 도식에서 벗어나, 조건에 따라, 사건화의 양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재구성해야 하지 않을까?”

“넘어선다는 것은, 국가적 형식으로 동일화하는 근대 내지 자본주의의 권력을 가로질러 대중 사진에 의해 비-근대적 세계를 창안하고 창출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맑스의 혁명적 사유가 인간중심주의, 진화론, 경제주의, 국가주의 등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달리게 해야하고 즐겁게 춤추게 해야 한다.”

보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권력’을 잡는 것이 가장 우선순위에 있을 이유는 없다. 위에 잘라낸 문장들은 모두 그러한 ‘강박’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요구하는 문장들이다. ‘강박’으로 인해 ‘행복한 여정에’서 ‘행복’을 뺀다면 얼마나 처참할 것인가? 나는 그랬다. 도그마로 받아들이고, 도그마를 재발설하면서 ‘권력’이 있는 ‘누군가’들의 집단이 세상을 바꿔주길 바랬다. 왜 ‘바랬’을까? 모른 척했지만, 우리에겐 그럴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과 의지가 향하는 방향의 문제였다. 어디로 갈 것인지 방향을 잃은 미친 말처럼 뛰기만 했었던 것이다. 당장 나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데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먼 미래의 일로 행복하길 유예했던 것이다.

“역사를 하나의 법칙으로 몰아”넣는 것은 하나의 환각제이다. 역사는 과거의 사건들의 집합 속에서 어떤 규칙을 추론하여 미래를 예언하는 점성술이 아니라 ‘지금-여기’에 우리 ‘밖’에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은 ‘지금-여기’가 어떤 조건에 놓여있는지, 거기서 어떻게 행복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행복해지기 위해 적극적으로 재구성해야 할 조건인 것이다. 꼬뮌은 그런 것이다. 행복해지기 위한 외부적 조건을 다양하게 접속하는 신체들의 연장(延長)이고 이것을 ‘꼬뮌’ 내적으로 모으고 나누는 그것이다.

조건을 “넘어선”다는 것은 억압의 작동 근원을 ‘권력’으로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의 외부를 창안하는 능산적 활동이다. ‘권력’의 두뇌가 제거되더라도 심장은 다시 두뇌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런 형태의 권력의 악순환을 넘어서는 사유의 재료로 활용하는 것이 들뢰즈·가타리의 ‘기계론’이다. “기계적 요소의 본성과 양상을 알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식의 고전적인 ‘기계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기계’란 “접속하는 이웃항이 무엇인가에 따라 본성을 달리하는 다른 기계”된다. 다시 말해 “기계란 고정된 본성을 갖는 고립된 어떤 실체가 아니라 관계를 구성하는 성분이고 그 관계 안에서 변하는 본성을 갖는 것이다.” 외부적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접속하고, 내적으로 나누는 신체란 결국 “관계를 구성하는 성분”으로서 ‘기계’와 다른 말이 아니다. ‘꼬뮌’은 결국 다양한 ‘기계’들이 접속하는 관계항(기계)에 따라 자신을 새롭게 구성하는 집합인 것이다.(대학의 “신민(新民)”개념이 떠오르는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인가?) 이는 권력의 획득을 통한 ‘타도’의 형식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억압적인 기재들 사이에 구멍을 뚫고 만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꼬뮌인 것이다. 억압의 상황을 뚫는 것이 바로 “창안”이 아닐까?

역사유물론과 가치론, 계급과 적대의 개념부터 꼬뮌의 의미까지 매우 거칠게 정리하였다. 앞선 세 개의 항목들의 경우에 읽어서 이해되는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볼만 하다. 하지만 마지막 “꼬뮌”의 문제는 읽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 “접속”과 “집합”을 해봐야만 진정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꼬뮌’은 어떤 명제가 아니며, 공리도 정리도 아니기 때문이다. ‘꼬뮌’은 현실을 재구성해서 “미-래”를 창출하는 삶의 방식인 것이다.

꿈에 나온 맑스는 자신의 책이 비판과 열광의 도가니탕이길 바랬다. 그리고 언제고 다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랬다. 바로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맑스를 읽으며 맑스주의를 비판(탈영토화)하고 열광(재영토화)하는 태도 그 자체가 바로 맑스주의가 아닐까? 그리고 ‘돌아온다’. 이것은 “우정”의 상징일 것이다. 현실적 관계를 넘어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고, 보편적인 인간의 해방을 바랬던 맑스의 그 태도에 대한 동의, 그걸 바탕으로 생성되는 “우정”. 그래서 맑스는 과거에 살았던 인물이면서, 현재의 친구이며, 미래의 희망인 것이다. 따라서 맑스는 ‘화석’도, 프로크라테스의 침대도, 계시도 아닌 것이다. 그러한 맑스에게 들뢰즈를 소개시켜준 이유는 그가 맑스가 원한 맑스주의(‘희망’을 창안하는 사상으로서 맑스주의)를 이야기한 ‘맑스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닐까?

꿈에서 들뢰즈는 좋은 책은 ‘튼튼한 책’이어야 한다고 했다. 튼튼한 책은 어떠한 비판의 칼도 뚫을 수 없는 강철과 같은 것이 아니다. 튼튼한 책은 이리저리 ‘사용’함으로써 지속가능한 책이다. 맑스와 들뢰즈가 한쌍으로 나온 꿈이 이진경의 손을 통해 “미-래의 맑스주의”가 되었다. 그리고 말한다.

“나를 따르지 말아라! 우리이자 각자인 저마다의 길을 가라! 그리고 만나서 놀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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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변화하기

  ...이러한 변형을 통해 맑스주의 전체를 근대적 지반에서 이탈하게 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맑스의 혁명적 사유가 인간중심주의, 진화론, 경제주의, 국가주의 등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달리게 해야하고 즐겁게 춤추게 해야 한다. 코뮨주의로 하여금 적대와 대립의 사유에서 벗어나 다양한 차이들이 만나고 공존하는 상생적 세계의 이정표로 만들어야 한다.

이진경 "미-래의 맑스주의"

  혐오스럽고 추한 혁명. 그러나 생각해보면 지배자들에게는 모든 혁명이 혐오스럽고 추한 게 아닐까. 6월의 지배자들은 '혁명이 혐오스럽다'는 말을 '혐오스러운 혁명이 일어났다'고 말한 게 아닐까. 혁명은 왜 추하고 혐오스러운가. 그것은 혁명이 지배자들을 혐오스럽고 추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봉기란 지배자들에 대한 미적 비난이다. 봉기자들은 지배자들과 미학을 달리한다. 6월의 봉기자들에게는 6월 혁명이 공화주의를 더럽힌 게 아니라, 공화주의의 더러움이 6월 혁명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고병권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자유롭게 달리고 춤추는 혁명, 다양한 차이들이 만나 공존하는 혁명. 혁명의 풍경이 그렇게 아름다운 만큼 지배자들은 더럽고 추하다. 혁명은 세계를 아름답게 만드는 방법이다. 나는 아름답지 못한 세상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고기를 먹지 않는 것, 휴지를 덜 쓰는 것, 화분에 물을 주고 식물과 함께 사는 방법을 익히는 것. 결국 혁명은 어느 시점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기 보다는 지금도 일어나고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이상 기다리지 않을 때, 끝나는 법이라오"라고 말했다. 나는 무슨 말인가 싶어 그 남자를 쳐다봤다. 그 남자는 웃으며 "방금 장마가 언제 끝날까라고 말하지 않았소"라고 말했다.

김연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다른 세상을 기대하지 않을 때, 희망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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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 오버의 달인 호모 오버쿠스

  학교가 끝나고 돌아가는 버스에서 친구가 내게 말했다.
"나는 오버, 오바한다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아.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서 냉소하는 말이니까"
그때 나는 한방 먹었다. 어쩌다가 우리는 감정을 드러내는 말들에 대해서 "오버하지마"라고 주의를 주기 시작한 걸까? 그게 죄도 아닌데 말이다.

  군대에서 그 친구에게 편지를 받았다. 편지엔 이런 말이 적혀있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 아니야"
그때 또 한방 먹었다. 어쩌다가 우리는 사랑받는 걸 부담스러워 하고 사랑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되어버린 걸까? 사랑하는 건 죄가 아닌데 말이다.

  오늘 나는 고병권 선생님(정말 선생님이다!)의 책을 읽었다.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그리고 읽는 내내 웃다가 울다가 혼자 별 "오버"를 다했다. 그리고 사랑했다. 그의 글과 글을 통해 나에게 다가온 세상, 그리고 소수자이길 바라는 나, 그리고 고추장 선생님을. 오버하는 법과 사랑하는 것은 결국 매한가지 스스로를 어딘가에 던지는 것이다. 그걸 두려워 하는 순간 우리는 눈뜬 봉사가 된다. 그걸 배웠다. 그리고 결심한다. 나는 "오버의 달인, 호모 오버쿠스"가 되겠다고. 두근거리는 이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냥 계속 두근거릴 생각이다.

죽도록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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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 바꾸기

  지금의 기계문명을 예찬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우리가 가야 하는 곳은 '기계 이전'이 아니라 '기계 이후'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분명히 우리 시대의 기계들은 생명체들을 생산 현장에서 몰아내 굶주리게 하고, 공기를 오염시켜 그들의 숨을 죄며, 석탄과 기름을 빨아들여 대지를 푸석거리게 한다. 그러나 기계와 생이 이토록 적대적으로 돌변한 건 기계에 내재된 필연 때문이 아니다. 기게와 생명의 적대는 생명과 생명의 적대를 옮겨 적은 것 뿐이다.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곳에서 기계는 인간을 착취한다. 문제는 운명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을 바꾸는 것이다. 문제는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향을 발명해내는 것이다.

고병권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통찰력'은 아주 단순한 삶의 편린에서, 흐르고 있는 일상에서 보고 듣고 하며 배우는 능력이다. 그래서 책을 통해 배우는 것이 하수의 배움이고, 사람을 통해 배우는 것이 중수의 배움이며, 온갖 것들로부터 배우는 것이 고수의 배움이라 하는 것이고, 통찰력은 그 깊이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통찰을 통해 삶의 방향을 바꾸는 사람은 장인이라 부를 수 있다. 그렇게 단계를 나눈다고 해서 책을 읽는 것이 하찮은 행위라고 치부하는 것은 아니다. 읽고 읽고 또 읽고, 쓰고 쓰고 또 쓰는 과정이 사람과의 만남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눈을 열어주고, 귀를 뚫어준다. 그리고 책 읽는 행위가 스승에게로 읽는 사람을 인도한다. 스승을 만나 읽고 이야기 하는 동안에 등장하는 온갖 예시로부터 눈으로 들어오고 귀로 들어오는 모든 것들로부터 배우는 방법을 익히게 된다. 그야 말로 절차탁마(切磋琢磨)! 그렇게 배우는 것과 삶을 일치시켜가면, 전혀 다른 차원의 '방법'을 '발명'하게 된다. 그 방법은 곧 나를 둘러싼 세계의 의미를 전환시키는 에너지이다. 누군가의 글에서 읽은 이 말도 그런 방법 중 하나. "책을 발로 읽는"방법이라고 한다. 책과 삶이 결합되어 있음을 이렇게 적절하게 표현한 바를 보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 누군가, "악플러 임"에게 '어느 정도'의 존경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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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성과 앎의 네트워킹 : 공부는 "-되기"?

  호두와 두뇌의 관계나 눈병과 식물의 씨 간의 관계는 어린아이가 부모를 닮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사성이란 본성에 의해 설명되었다. 이런 사유 속에서 생명이나 생물이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기는 어려웠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하나로 묶어주고 있는 비밀스런 연결망"의 한 매듭, 수많은 매듭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이진경 "미-래의 맑스주의"
고전의 스승들은 우리로 하여금 공부에 대한 좁은 울타리를 박차고 나오도록 종용한다. 그들이 보여주는 공부의 길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 - 책을 통해 존재와 세계의 심연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리고 존재와 세계의 모든 것을 책으로 변환하는 것. 물론 이 두 개의 경로는 궁극적으로 서로 통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단계별로 나누어져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리혀 둘은 늘 상호 교섭하면서 나란히 간다.
(백 몇 페이지 언저리)

사제 관계를 회복하고 싶다면, 새로운 공부를 시도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동료들을 불러 모아 살아 움직이는 학습망을 조직하라...(중략)...뇌의 존재 이유는 '네트워킹'하는 데 있다고 한다. 네트워킹을 하지 못하면 신경망이 점차 끊어져 결국 치매나 죽음에 이른다는 것.
(팔십 몇 페이지 언저리)

고미숙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서로 다른 두개의 텍스트에서 '유사성'을 발견할 때 기쁘다. 그리고 그 '유사성'이 단순히 지시하는 것이 같거나, 견해가 비슷하거나 한 것이 아닐 때, 하지만 어떤 맥락을 통해서 '연결'될 때에는 훨씬 더 기쁘다. 이 기쁨은 하나의 텍스트에서 얻어낸 것을 다른 텍스트에 교접함으로서 다른 차원의 앎으로 이동하는데서 오는 기쁨일 것이다. 마치 여행지에서 계획에 없는 무언가를 보고 "와!"하는 신선함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호두와 두뇌는 닮았고, 어린아이는 그 부모와 닮았다. 이 온갖 유사성들의 '비밀스러운 매듭'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어제 읽은 고미숙의 텍스트가 떠올랐다. 사제관계의 회복, 배움을 찾아 떠나는 학인들, 동료를 불러모아 공부하는 것, 암송을 통해 배움을 공유하는 방식 등. 이것들 역시 '유사성'에 근거한 공부하기가 아닐까? 제자는 스승을 닮고, 스승은 제자를 닮는다. 독서가는 자신이 읽은 책을 닮는다. 이 유사성에 근거해서 배움의 폭과 깊이를 넓혀나가는 방식은 지금까지 '학교'에서 배운 배움의 방식과 전혀 다르다. 한 분야 밖의 것에 대해서는 무지하라고 가르치는(우리 교수님은 실제로 그렇게 될 것을 주문했다!) 학교 교육은 닮기와 되기를 통해 학습할 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항상 읽고 듣는 것과 거리를 두고 판단하는 훈련을 하는 동안 마음은 거칠거칠해져 갔던 기억이 있다.

  호두와 뇌의 유사성, 아이와 부모의 유사성은 전혀 다른 개체가 다른 개체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동일성과 차이에 근거한 분류, 범주화 하는 분류는 어떤 범주에도 들어갈 수 없는 극히 미미한 소수를 취급하지 않는다. 유사성에 근거한 연결짓기는 개체를 개체로 인정하고, 유사성의 네트워킹을 통해 차이를 지속적으로 산출해 낸다. 전자가 동일한 것들 끼리의 집합이라는 관점에 무게중심이 있다면 후자는 같지만 "다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렇다면 그 어느 것과도 유사하지 않은 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닮지 않은 건 없다. 철학사에서 일자(一者)로 지칭되는 그것을 제외하고 닮지 않은 것이란 없다. 이 말은 다시 말해 '차이'나지 않는 개체란 없다는 말과 같다.

  유사함에 의한 차이에 근거해 있는 사물들의 불규칙한 질서와 유사하게 되기를 통해서 각자의 차이를 구성하는 배움의 네트워크가 겹쳐졌다. 읽기의 방향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뻗는 것도 마찬가지로 유사함의 단초를 찾아 각자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읽기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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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자의 허구성 :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모든 사람에게는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다. 모든 이들은 어떤 면에서든 항상 공식적인 신원확인이나 표준들에서 벗어나는 실존의 독특성을 지닌다. 소수자는 우리가 특별히 만나야 할 어떤 인물, 어떤 계층이 아니다. 그는 기준에 벗어나는 모든 순간을 만들어 내는 우리 자신이다. 다수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수자는 아무도 아닌 자(nobody)이다.

진은영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어렴풋한 인식에서 뚜렷한 인식으로 나아갈 때, 책은 아주 좋은 반려자가 된다. 지금까지 나는 소수자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애정의 근원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 애정 속에서는 아마 동정이나 연민의 감정도 있었을 것이다. 책을 통해 그러한 감정이 소수자의 소수성을 인정하고 연대를 이루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이라는 점이 명확해졌다. 소수자는 "나"의 외부에 있는 "누군가"가 아니다. 그들은 곧 "나"이며, 내가 곧 "그들"이다. 내가 보통의 상식(bon sens)에 의문을 가지고 다른 무언가를 하려 할 때 나는 소수자를 만나고 소수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잊고 있었던 "희망"의 열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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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 10점
진은영 지음/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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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반복 :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놀이의 관점에서 보면 주사위놀이는 단지 여섯개의 면만으로도 무수한 차이의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사위 던지기가 도박대 앞에서의 '놀이'(spiel)라면 4가 두 번 나온다 할지라도 그것은 반복이 아니라 차이이다. 처음 던졌을 때 4는 상대방의 앞선 숫자인 5와 이어질 경우 패배를 의미하지만, 만일 상대방의 2에 이어 또 다시 4가 나온다면 이때는 역전을 의미한다. 이 경우 두 개의 4는 전혀 다른 숫자이며 따라서 동일한 4가 아니라 차이나는 4가 반복되는 것이다. 주사위 놀이의 4는 결코 차이 없이 되돌아올 수 없다. 그것은 차이를 산출하는 운동의 반복이다.

진은영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유물론은 이 '외부'에 의해 사유하는 방법이다. '역사'란 바로 이 회부, 원리의 외부적 조건들을 지칭한다. 따라서 맑스의 유물론은 항상-이미 역사를 통해, 역사라는 조건에 의해 사유하는 방법이란 점에서 언제나 역사 유물론이다. 역사란 원리들에 부가되는, 원리가 통과해 가는 시간적인 어떤 지대(地帶)의 이름이 아니며, 유물론이 적용되어야 할 어떤 시대의 이름도 아니다. 그것은 유물론적으로 사유하기 위해 항상 기대어야 하고 의거해야 할 외부적 조건의 이름이다.

이진경 "미-래의 맑스주의"

  "차이의 반복"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결국 "외부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주사위 놀이에서 같은 수는 얼마든지 나올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같은 수가 아니다. 숫자가 나오는 맥락에 따라 그것의 '의미'는 계속 변한다. 그 '맥락'이 주사위와 관계된 '외부'이다. 결국 주사위의 숫자는 어떤 조건에 있느냐에 따라 승리가 될 수도, 패배가 될 수도 있다.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사건'들이란 그렇게 주사위가 외부와 맺는 관계에 따라 구성하는 하나의 점(點)들 이다. 따라서 어떤 '사건'은 목적을 향해 선(線)적으로 이어지는 인과의 사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차이를 산출하는 공간적인 운동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차이의 반복"은 전혀 다른 윤리학과 존재론을 구성한다. 그것에 관해서는 더 탐구해 보아야 하겠지만, 적어도 그것이 의미들과 삶의 "풍요로움"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건 짐작할 수 있겠다. 내부와 외부를 날카롭게 나누고, 양자가 접속해서 생성하는 의미의 맥락을 사유하지 않고서는 '소수자'를 무시하거나 잘해봐야 "불쌍히"여기는 관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또 스스로의 존재를 인과 고리 속의 어디쯤으로 규정하여, 사회의 부속으로 여기는 우울한 자기규정에서 벗어날 길도 막힐 것이다.
  주변과의 능동적인 접속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지속적으로 산출하는 것. 그것이 "차이와 반복"을 통해 "외부성"을 이해하는 앎과 삶이 일치하는 실천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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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 10점
진은영 지음/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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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맑스주의 - 10점
이진경 지음/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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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친구하기 :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우리는 원인과 결과를 상호배타적인 독립적 존재로 규정할 수 없다. 풋사과가 아담의 허약한 장과 '만날' 때만 풋사과는 비로소 배탈의 원인이 된다. 따라서 원인과 결과를 서로 분리해서 독립적인 것으로 사유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물은 다른 사물에 의존해서 생성된다'는 연기의 진리는 결과가 원인에 의존해서 생성될 뿐만 아니라 원인도 결과에 의존해 생성된다는 것을 뜻한다.

진은영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내가 "앨리스는 자란다"고 말할 때, 나는 (이 말로) 그녀가 이전보다 더 커짐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곧 그녀가 지금보다 더 작아짐을 뜻한다. 분명 그녀는 보다 크면서 동시에 작을 수 없다. 그러나 그녀가 보다 커지고 (시간을 거꾸로 보았을 때) 보다 작아지는 것은 동시적인 것이다. 그녀지는 지금 더 크고, 그 전에는 더 작았다. 그러나 그녀가 이전보다 더 커지는 것과 이후보다 더 작아지는 것은 동시적이다. 이것이 생성의 동시성이며, 그 고유한 점은 현재를 비켜가는 데 있다.

들뢰즈, 이정우 역 "의미의 논리"

  아래 단락은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 첫 문단이다. 저 부분을 처음 읽었을 때, 당췌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몇번을 계속 읽다가 이해를 포기했었다. 첫 문단부터 막혀버린 텍스트와 친해지기란 너무 어려워서 읽기를 그만두었다. 그런데 이제서야 "이해"했다고 하기는 뭐하고 "번쩍"했다. 진은영의 책을 읽으면서도 들뢰즈를 읽을 때와 마찬가지의 난관에 계속 부딪혔는데, 니체를 제대로 읽지 않고서 누군가의 소개를 읽는 것은, 상대방을 모르고 소개자의 이야기를 토대로 상대방과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소개팅의 어려움과 같았다. 하지만 소개팅에서도 어떤 공감대가 형성되거나, 공통으로 좋아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면 자기도 모르게 '말'이 술술 풀리듯이 이 경우도 그와 같다. 접근하기 어려웠던 들뢰즈의 그 텍스트가 니체를 나에게 소개하는 진은영의 텍스트에서 "번쩍"하며 들어온 것이다. 감격의 순간!

  요즘들어 부쩍 생각하는 것인데, 확실히 책읽기는 읽고 있는 그 책 한권에만 머물러서는 안되는 것 같다. 텍스트와 연결되는 온갖 연쇄들 속에서 나의 몸이 감흥을 느끼는 방향으로 뛰는 것이 더 즐겁지 않을까? 이해하기 어려운 텍스트에 묻혀서 꾹꾹 참아가며 읽어나가는 것도 방법이지만, 아주 단촐한 이해라도 누군가의 그것과 섞어간다면 책이 줄 수 있는 깊이와 폭을 넓혀가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게 정말로 '구술'로 주고 받을 수 있는 친구라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도 우리의 책장엔 거기에 자리한 책들의 종류만큼 많은 친구가 있지 않은가! 친구들에게 나의 의견을 말하고, 궁금한 것을 물으면 물을 수록 새로 사귈 수 있는 친구도 많아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니체가 했다는 그 말. 사람은 자신이 체험한 만큼 읽을 수 있고, 책은 그 사람의 체험만큼만 자신을 보여준다는 말은 전적으로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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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촉발 : 호모 쿵푸스

  끙끙대며 써낸 독후감은 매번 맞춤법에서 시각, 논리적 구성등에 이르는 세밀한 논평과 함께 되돌아왔다. 레포트를 돌려받을 때마다, 나는 긴장과 감동으로 가슴이 '떨렸다'. 아마도 내 하찮은 사고의 파편들이 세심하고도 치밀한 지적 배려를 받는 데서 오는 자긍심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수업을 통해 나는 그간의 전공수업들, 운동권 서클에서 한 의식화 공부, 그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더 강렬한 지적 촉발을 받았다.

고미숙,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대학교 4학년에 만난 친구들과 함께 나눈 체험은 강렬한 자극이었다. 강의실에서 여러 학생, 교수님과 나눈 대화와 토론도 물론 자극적이었지만, 그것은 뭐랄까 유머와 개그를 동반하지 않은 푸르죽죽한 냄새가 있었다. 하지만 친구들은 늘 어디론가 "달렸다". 그리고 가끔 쉬기도 했었고.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서 지식과 감성, (나름대로의)사유가 엮여서 만들어지는 고색창연한 말의 잔치가 벌어졌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내일은 무슨 이야기로 친구들을 웃길까 고민하며 책을 읽는 밤이었다.
친구들과의 놀이, 대화, 공부에서 학교에서의 수업보다 더 강한 상상력과 접속의 에너지를 느끼지 못했다면, 지금까지 오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호모 쿵푸스"는 사실 신선하지 않았다. 읽어가며 느낀 기분은 대학교 4학년 때의 그 친구들을 다시 만나 이야기하는 느낌이다. 지금은 각자 고군분투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 그 친구들에게 선물하고 싶다. 그때 우리의 기록이 여기에 있다하며 그 기억을 다시금 재생하고 싶다. 재현이 아니라 차이를 가진 반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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