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이야기
명동 교보문고에서 맑스를 만났다. 무엇인가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한 나는 무수하게 쌓여있는 질문더미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 무수하게 쌓여있는 질문은 3년여 간의 공백 끝에 다 날아갔는지 내용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당장 물을 수 있는 것을 물었다.
“좋은 책이란 어떤 책이죠?”
고작 저 질문을 하려고 나의 가슴은 그리도 뛰었단 말인가 하고 후회하고 있을 무렵 돌아오는 답이 질문이 가진 본래의 빛을 발하게 해 주었다.
“논리적 전개는 면도칼 하나 들어갈 틈이 없이 치밀하면서도 다 읽고 난 후에는 비판이든, 투덜거림이든, 열광적 동의든 할 수 있게 만드는 책이 좋은 책이라네. 그래서 그 기억 때문에 언제고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책이 좋은 책이지.”
험악한 인상과는 달리 다정하게 설명해준 맑스의 말을 곱씹으며 돌아서는 데, 인문학 코너 한켠에 들뢰즈가 있었다. 그에게 맑스의 말을 전하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의 답.
“대체로 동의해. 하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렇기 때문에 언제 돌아와도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튼튼한 책이어야 한다는 점이야!”
명동엔 교보문고가 없다. 그리고 맑스와 들뢰즈가 서점에서 시간 죽이고 있을 리도 없다. 그렇다. 이것은 꿈 이야기이다. 가슴 뛰는 그 꿈을 꾸고 일어난 새벽, 책상 앞에 앉아서 꿈속의 장면들, 대화들, 그들의 표정들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아이돌에 정신 팔린 10대 소년 마냥 그런 꿈을 꾸었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였거니와, 다른 사람도 있었을 텐데 왜 하필 그 사람들 이었을까 생각해보았다. 그 때 번뜩 머리를 스치는 생각. 그들은 자랑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맑스님의 책은 논리적인 전개가 치밀하면서도 감수성이 어찌나 풍부하신지 읽는 이의 반작용까지 고려하셨고, 들뢰즈님의 책은 치밀하면서도 유행을 쫓지 않고 만들어서 세월이 흘러도 튼튼하게 살아있을 것이다.(처음엔 물리적으로 튼튼한 책이라고 생각하였으나, 해석의 키워드가 “자랑”으로 바뀌자 장점이 극대화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그런 꿈을 꾸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지금부터 할 이야기의 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미-래의 맑스주의”라는 책
"미(未)-래(來)의 맑스주의"는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다. 제목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지금까지 조심스럽게 “맑스를 좋아한다”라고 말할 때 나의 그 “맑스”는 언제의 맑스였을까? 맑스를 읽을 때 나는 습관적으로 19세기라는 시대적 조건을 고려해왔다. 10여년 넘게 배워온 제도교육의 성과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어떤 책은 그 시대의 조건을 고려하며 읽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그 시대에 재(앙)이었던 사상을 한줌의 재로 만들어 다루기 쉽게 만들었던 그 이념을 알게 모르게 몸에 익힌 것이다. 두 번째 습관은 앞의 것보다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뛰어날 것도 없는 것이다. 현재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갔다는 데 의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다음엔? 이 경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책에서 말하는 바를 고지식하게 받아들여서 현실을 재단(裁斷)해 버린다는 점이다. 과거의 책에 ‘지금’의 현실을 끼워 맞추는 것. 이렇게 되면 사상은 “프로크라스테스의 침대”가 되어 현실의 다리를 잘라버린다.
“미-래의 맑스주의”라는 제목으로부터 받은 범상치 않은 느낌의 근원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사상’이라는 말을 통해 ‘사상’을 ‘과거’에 가두는 습관, ‘현실적 적용’이라는 전략을 통해 ‘현실’을 사상에 끼워 맞추려는 습관, 이 두가지 습관을 한꺼번에 비판하는 말이기 때문에 그것은 범상치 않다.
역사유물론, 노동가치설, 계급과 적대의 문제를 각각의 한 단원으로 다룬다. 각 단원에서 주목해할 점들은 맑스주의라는 이름으로 전개되어 왔던 과거사의 정리, 맑스의 저작 자체에서 읽혀지는 내용의 요약이 아니다. 저 익숙한 개념들을 책에서 다루는 방법은 외부와 접촉시키는 방법이다. “맑스는 자신과 다른 생각, 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을 만남으로써 이전의 자신과 다른 사람, 다른 사상가가 된다.”(270쪽)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맑스주의를 맑스주의의 외부와 접촉시킴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맑스주의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맑스주의를 탈영토화 시키고, 재영토화 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서만 머무를 것인가? 역사유물론이 외부를 통해 사유하고, 특정한 조건들을 고려하는 태도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진경’의 맑스를 다시 탈영토화하고 재영토화 하는 과정을 “반복”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이진경이 말하는 “미-래의 맑스주의”가 아닐까?
꼬뮌주의와 꼬뮌
“역사를 하나의 법칙으로 몰아넣고, 혁명을 하나의 단일한 이미지로 포섭하는 도식에서 벗어나, 조건에 따라, 사건화의 양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재구성해야 하지 않을까?”
“넘어선다는 것은, 국가적 형식으로 동일화하는 근대 내지 자본주의의 권력을 가로질러 대중 사진에 의해 비-근대적 세계를 창안하고 창출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맑스의 혁명적 사유가 인간중심주의, 진화론, 경제주의, 국가주의 등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달리게 해야하고 즐겁게 춤추게 해야 한다.”
보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권력’을 잡는 것이 가장 우선순위에 있을 이유는 없다. 위에 잘라낸 문장들은 모두 그러한 ‘강박’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요구하는 문장들이다. ‘강박’으로 인해 ‘행복한 여정에’서 ‘행복’을 뺀다면 얼마나 처참할 것인가? 나는 그랬다. 도그마로 받아들이고, 도그마를 재발설하면서 ‘권력’이 있는 ‘누군가’들의 집단이 세상을 바꿔주길 바랬다. 왜 ‘바랬’을까? 모른 척했지만, 우리에겐 그럴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과 의지가 향하는 방향의 문제였다. 어디로 갈 것인지 방향을 잃은 미친 말처럼 뛰기만 했었던 것이다. 당장 나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데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먼 미래의 일로 행복하길 유예했던 것이다.
“역사를 하나의 법칙으로 몰아”넣는 것은 하나의 환각제이다. 역사는 과거의 사건들의 집합 속에서 어떤 규칙을 추론하여 미래를 예언하는 점성술이 아니라 ‘지금-여기’에 우리 ‘밖’에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은 ‘지금-여기’가 어떤 조건에 놓여있는지, 거기서 어떻게 행복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행복해지기 위해 적극적으로 재구성해야 할 조건인 것이다. 꼬뮌은 그런 것이다. 행복해지기 위한 외부적 조건을 다양하게 접속하는 신체들의 연장(延長)이고 이것을 ‘꼬뮌’ 내적으로 모으고 나누는 그것이다.
조건을 “넘어선”다는 것은 억압의 작동 근원을 ‘권력’으로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의 외부를 창안하는 능산적 활동이다. ‘권력’의 두뇌가 제거되더라도 심장은 다시 두뇌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런 형태의 권력의 악순환을 넘어서는 사유의 재료로 활용하는 것이 들뢰즈·가타리의 ‘기계론’이다. “기계적 요소의 본성과 양상을 알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식의 고전적인 ‘기계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기계’란 “접속하는 이웃항이 무엇인가에 따라 본성을 달리하는 다른 기계”된다. 다시 말해 “기계란 고정된 본성을 갖는 고립된 어떤 실체가 아니라 관계를 구성하는 성분이고 그 관계 안에서 변하는 본성을 갖는 것이다.” 외부적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접속하고, 내적으로 나누는 신체란 결국 “관계를 구성하는 성분”으로서 ‘기계’와 다른 말이 아니다. ‘꼬뮌’은 결국 다양한 ‘기계’들이 접속하는 관계항(기계)에 따라 자신을 새롭게 구성하는 집합인 것이다.(대학의 “신민(新民)”개념이 떠오르는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인가?) 이는 권력의 획득을 통한 ‘타도’의 형식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억압적인 기재들 사이에 구멍을 뚫고 만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꼬뮌인 것이다. 억압의 상황을 뚫는 것이 바로 “창안”이 아닐까?
역사유물론과 가치론, 계급과 적대의 개념부터 꼬뮌의 의미까지 매우 거칠게 정리하였다. 앞선 세 개의 항목들의 경우에 읽어서 이해되는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볼만 하다. 하지만 마지막 “꼬뮌”의 문제는 읽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 “접속”과 “집합”을 해봐야만 진정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꼬뮌’은 어떤 명제가 아니며, 공리도 정리도 아니기 때문이다. ‘꼬뮌’은 현실을 재구성해서 “미-래”를 창출하는 삶의 방식인 것이다.
꿈에 나온 맑스는 자신의 책이 비판과 열광의 도가니탕이길 바랬다. 그리고 언제고 다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랬다. 바로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맑스를 읽으며 맑스주의를 비판(탈영토화)하고 열광(재영토화)하는 태도 그 자체가 바로 맑스주의가 아닐까? 그리고 ‘돌아온다’. 이것은 “우정”의 상징일 것이다. 현실적 관계를 넘어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고, 보편적인 인간의 해방을 바랬던 맑스의 그 태도에 대한 동의, 그걸 바탕으로 생성되는 “우정”. 그래서 맑스는 과거에 살았던 인물이면서, 현재의 친구이며, 미래의 희망인 것이다. 따라서 맑스는 ‘화석’도, 프로크라테스의 침대도, 계시도 아닌 것이다. 그러한 맑스에게 들뢰즈를 소개시켜준 이유는 그가 맑스가 원한 맑스주의(‘희망’을 창안하는 사상으로서 맑스주의)를 이야기한 ‘맑스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닐까?
꿈에서 들뢰즈는 좋은 책은 ‘튼튼한 책’이어야 한다고 했다. 튼튼한 책은 어떠한 비판의 칼도 뚫을 수 없는 강철과 같은 것이 아니다. 튼튼한 책은 이리저리 ‘사용’함으로써 지속가능한 책이다. 맑스와 들뢰즈가 한쌍으로 나온 꿈이 이진경의 손을 통해 “미-래의 맑스주의”가 되었다. 그리고 말한다.
“나를 따르지 말아라! 우리이자 각자인 저마다의 길을 가라! 그리고 만나서 놀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