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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과 코뮨주의 _ ide.<국제워크샵> 다니가와 간

1.

“대중과 지식인 어느 쪽과도 격렬하게 대립하는 공작자의 무리 … 두 개의 머리를 가진 괴수 같은 매체를 만들어야 한다. 그들은 어느 쪽으로부터도 도움을 받을 전망이 없는 유격대로서, 대중의 침묵을 내적으로 파괴하고 지식인의 번역법을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대중을 향해서는 단호한 지식인이며, 지식인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대중인 바, 위선의 길을 가로지르는 공작자의 시체 위에 싹트는 것, 나는 그것만을 지지한다. 그리고 오늘날 연대를 구해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 미디어들의 대화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내일을 위해 죽는 언어이리라.”(「공작자의 시체에 싹트는 것」, 1958년 6월)

2.
‘동아시아’라는 장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마찰과 균열’이 각인된 곳, 무엇을 하더라도 어떤 ‘척도’(근대성)를 의식할 수 밖에 없는 ‘왜곡된’ 공간에서 어떻게 ‘갈등, 모순’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일까? 또 어떻게 이러한 질문들 속에서 ‘함께’ 살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답을 줍니다. 질문 속에 섞여들어간 ‘함께’라는 말 때문이지요. ‘함께’라는 말은 모순이나 갈등 같은 어떤 사태들의 ‘사이’,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사이’, 마찰을 일으키는 요소들의 ‘사이’에 있습니다. 그것들의 ‘사이’에서 그것들을 잇는(연대시키는) 말, 이를테면 ‘공작자*의 언어’인 셈이지요.

우 리는 어떤 순간에도 늘 ‘함께’ 있습니다. 어딘가에 소속된 조직원도, 당원도 아닌채로 ‘탈영역적인 교통의 장’ 속에 있으면서 그 ‘장’(場)을 만들어내고 있는 셈이죠. 그리고 이 장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합니다. 왜냐하면 이 장은 우리가 이 속에서 공동의 활동을 만들어내는 그 시간 동안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것마저도 우리에겐 하나의 축복입니다. 그 해체 속에서 우리는 ‘다시-함께-시작’할 수 있는 ‘사이’를 얻게 될테니 말입니다.

영원히 ‘함께’ 지속할 수 없다는 그 (불)가능성과 더불어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모순-갈등’ 속에서 ‘함께’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분단’과 ‘왜곡’을 직면하는 자가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는 것이 지금 우리를 기쁘게 하길 바랍니다.
* 공 작자(工作者)는 일본의 사상가 다니가와 간의 핵심적인 개념이다. 원래는 일본 공산당에서 대중을 계몽·선도하는 전위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나 다니가와 간은 1950년대 후반 ‘서클마을’이라는 코뮨 활동을 하면서 ‘공작자’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데, ‘전위와 대중의 경계를 넘나들며 양쪽 모두에 사건을 일으키고 스스로도 변신해 가는 자’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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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과 코뮨주의 _ ide.<코뮨주의와 유머> 인용

1. 구성적 활동 : “코뮨의 구성적 활동의 본질은 구성 활동의 무한한 반복에 있다. 코뮨은 매 순간의 구성적 활동으로 분주하다. 새로운 만남, 모종의 작당들, 낯선 음모로 붐빈다. 그래서 코뮨은 불안정하며 위태롭고 빈번히 해체의 위협에 마주친다. 그러나 코뮨은 안정된 공동체의 유지와 보존을 위해 구성적 활동을 제한하는 대신 분주하게 되풀이되는 구성 활동의 불안정성에 존재를 전면적으로 기투한다.” – 286쪽

2. “공동체의 구성에 실제적 계기를 이루는 것은 정서의 감응” – 287쪽

2-1. “감응은 하나의 변용에서 다른 변용으로의 이행 활동을 의미한다. 이 이행을 통해서 우리의 신체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용된다. 신체는 이전보다 더 큰 행위 능력을 지니도록 변용될 수도 있고 반대로 작은 행위 능력을 지니도록 변용될 수도 있다. 변용은 이행 활동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결과 혹은 상태이다. 스피노자는 신체의 능력을 감소시키는 이행을 슬픔의 감응이라고 부르며 반대로 신체의 능력을 증대시키는 이행을 기쁨의 감응이라고 부른다.”

2-2. “어떤 공동체가 공포에 의해 구성되거나 유지될 때 우리는 이 공동체를 ‘슬픔의 공동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반대로 한 공동체가 기쁨의 감응에 의해 구성원들의 행위 능력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일 때 우리는 이 공동체를 ‘기쁨의 공동체’로 정의할 수 있다. 코뮨은 기쁜 감응의 공동체이며, 코뮨의 구성적 활동은 기쁜 감응의 구성적 활동이다.” – 289쪽

2-3. (카산드라 신화에 대하여) “이 신화는 사랑이나 기쁨과 같은 정서적 투자를 동반하지 않는 진리는 공동체적 활동을 구성하는 데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294쪽

2-4. “카산드라의 비극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예언자들은 새로운 정서적 감염능력이라는 무기를 발명해내야 한다. 그렇다면 기쁨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능동적 활동에 동반되어야 할 정서적 감염 능력, 다시 말해 ‘능동적’ 감응 능력이란 무엇인가?” – 295쪽

2-4-1. “스피노자는 우리의 감응 활동을 능동과 수동으로 구분한다. 우리가 우리의 활동이나 기쁨과 슬픔과 같은 정서적 변용을 일으키는 원인들을 명석판명하게 인식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능동적이다. 이와 달리 원인들을 부분적으로만 인식할 때 우리는 수동적이다.” – 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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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2

“우리는 지나간 사람들을 추도한 뒤에 자기나 다른 사람이나 모두 순결하고 총명하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갈 것을 빌어야 한다. 허위의 가면을 벗어 버리고 자기와 남을 해치는 세상의 몽매와 폭력을 제거할 것을 빌어야 한다.

우리는 지나간 사람들을 추도한 뒤에 인생에 조금도 의의가 없는 고통을 제거할 것을 빌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만들어 내고 감상하는 몽매와 폭력을 제거할 것을 빌어야 한다.

우리는 또 인간은 다 정당한 행복을 누리게 해야 한다고 빌어야 한다.”

- 루쉰전집 1권, [무덤], <나의 절열관>, 197쪽

 

“식욕은 자기를 보존하는, 즉 지금의 생명을 보존하는 일이고, 성욕은 후손을 보존하는, 즉 영구한 생명을 보존하는 일이다. 먹고 마시는 것은 결코 죄악이 아니요, 불결한 것도 아니며, 성교도 역시 죄악이 아니요, 불결한 것도 아니다. 먹고 마신 결과 자신을 기르게 되지만 그것은 자신에 대한 은혜가 아니다. 성교의 결과 자녀가 태어나지만 그것은 물론 자녀에 대한 은혜로 여길 수 없다. –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모두가 생명의 긴 여정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니, 선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가 누구의 은혜를 입었는지 구분할 수 없다.”

- 같은 책, <지금 우리는 아버지 노릇을 어떻게 할 것인가>, 204쪽

“나중에 태어난 생명은 언제나 이전의 것보다 더욱 의미가 있고 더욱 완전하며, 이 때문에 더욱 가치가 있고 더욱 소중하다. 이전의 생명은 반드시 그들에게 희생해야 하는 것이다.”

- 같은 책, 같은 글, 205쪽

“더구나 어린 사람이 권리를 받았다 해도 결코 영원히 점유하는 것이 아니며, 장래에 자신들의 어린 사람에 대해 여전히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이다. 다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 뿐 일체가 중개인일 뿐이다.”

- 같은 책, 같은 글, 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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