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질문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모든 질문이 이미 답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다. 답할 수 없는 질문은 제기될 수도 없다. ‘질문’은 답을 호출해내는 역할을 한다. 답들이 질문을 만들고, 질문이 답을 찾아준다. 삶을 잘 산다는 것은 무수한 의문들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 의문들이 품고 있는 답을 질문을 통해 다시 찾아낸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세계(질문-답)는 이미 무결하게 주어져 있다. 문제는 그것들이 품고 있는 무한의 결들을 읽어내는 것. 두 개의 눈, 두 개의 귀로 보고 듣는 것보다 더 많은 눈과 귀들로 보고, 듣고, 서로 말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짧은 시간의 대화, 감응 만으로도 질문이 생기고, 질문에 대한 답도 생겨난다. ‘질문’조차 제기하기 힘든 문제라고 여겼던 것들이 그 짧은 감응의 순간 속에서 해소된다. 공동체적 사랑을 믿어라.
#2
‘강렬한 30분’이 왔다. 모짜르트 교향곡들은 짧은 것들이 많아서 30분이면 충분하다. (보통 교향곡은 ‘길고, 지루한 클래식 음악’으로 표상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한 이미지는 아마도 점점점 거대해져갔던 낭만주의-후기낭만주의가 만들어 낸 선입견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내리기 15분 전쯤부터 듣기 시작해서, 내려서 집까지 걸어오는 15분 동안 듣는 모짜르트 교향곡은 더러운 것들을 씻어내는 맑은 물, 갑갑한 가슴에 흘러든 생수같다. 밤 하늘에 가까이 다가간 육교에서 찰랑거리는 스케르초를 들을 때, 불편함, 슬픔, 우울이 한없이 작아지는 것을 느낀다. 바이올린과 목관악기들의 교차는 소리로 만든 봄비 같다. 비온 뒤 시작되는 오케스트라 총주는 비가 그친 후 모습을 드러낸 청명한 하늘이리라. 답할 수 있는 질문만이 제기되는 것과 같이 좋은 음악은 좋은 상태일 때 들어야만 좋은 음악이 될 수 있다. 내가 좋은 상태일 때 모짜르트는 위대한 친구가 되고, 그의 곡들의 우정의 선물이 된다. 내가 나쁜 상태일 때 그는 단순한 위로가 될 뿐이다.
#3
번뇌나 갈등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용기를 길러야겠다. 아무리 능숙한 농부라 하더라도 그는 땅의 생장력, 자연의 우발성을 두려워하고, 그것을 사랑한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때문에 자신을 부정하는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다. 그래서 용기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오만한 것이다. 용기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