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와 이해의 스팩트럼

모든 행동이나 주장들에는 비교적 분명한 이유에서부터 불분명한 이유까지 ‘이유들의 스펙트럼’이 있다. 이 다양함을 ‘하나’로 환원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 말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환원 불가능한 빈자리를 용납하지 못하는 무능력 뿐. ‘이유’ 만큼이나 ‘이해’도 마찬가지이다. 보다 더 이해하고 있고, 덜 이해하고 있을 뿐, 절대적 몰이해는 없는 것이다. 양이나 수치로 환산하지 못하는 것들을 그냥 놓아두는 것이 힘든 이유는, 예측 불가능성에서 비롯되는 불안감 때문이다. 불안과 두려움을 기대와 설레임으로 전환시킬 수는 없을까? ‘삶’의 모든 국면을 진리의 현전이라 믿는다면, 더더욱 그 공백을 사랑해야 한다.

“실제의 그들은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모습과 같지 않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것. 이것은 신의 자기희생을 본받는 것이다.나 역시 스스로 상상하는 것과 다르다. 그것을 아는 것이 바로 용서이다.” – 시몬 베이유, <중력과 은총>, 23쪽

실제와 상상 사이의 차이, 그 차이가 공백을 이루고 있다. ‘신’을 전체인 우주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의 희생은 전체성을 포기하고 지속하는 개체화 운동이다. 전체 임에도 개체로 드러나는 것, 상상과 실제의 간극을 만들고-없애는 그 운동. 개체의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모든 우발성의 결과들(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고, 거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공백’에 대한 사랑이 곧 삶에 대한 사랑이고, 망상과 상상에 대한 용서가 곧 운명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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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와 여기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음악을 들을 때, 좋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 가슴이 두근거린다. 책이나 음악 이야기들은 모두 어딘가에서 일어난 일이고, 어떤 것에 담겨져 전해지는 것들이다. 이렇게 전해지는 것들이 듣고, 보고, 말하는 신체에 직접적인 변화(두근거림)를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그것들이 당장 느껴지는 직접적인 변화(두근거림) 너머의 변화를 보여주고, 들려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담고서 현시하지 못하는 음악과 책과 이야기는 두근거림을 주지 못한다. 당장의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 너머의 변화를 어떻게 일으킬 수 있을까.

‘너머’는 어떤 벽 ‘너머’, 어떤 경계 ‘너머’이다. 참 싫은 것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아프고, 그것을 없애버리고 싶어할 때, 신체능력의 벽, 정서적 수용력의 경계가 실존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 벽과 경계의 실존이 희망적인 이유는 그것들의 실존이 표현하고 있는 ‘너머’ 때문이다. ‘벽’이 있는 곳에 너머가 있다. 두근거리게 만드는 문장들, 음악들, 이야기들은 그 벽들을 무시로 뛰어 넘어 ‘여기’로 온 것들이다. 그것들과의 만남이 두근거리는 이유가 밝혀졌다! ‘너머’에서 온 것들을 직접 만났다는 것이 ‘너머’와 ‘여기’가 늘 통하고 있음을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쉬지 않고 벽을 만들고, 그 벽을 쉬지 않고 부수고 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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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 들뢰즈

“…식욕은 자기를 보존하는, 즉 지금의 생명을 보존하는 일이고, 성욕은 후손을 보존하는, 즉 영구한 생명을 보존하는 일이다. 먹고 마시는 것은 결코 죄악이 아니요, 불결한 것도 아니며, 성교도 역시 죄악이 아니요, 불결한 것도 아니다. 먹고 마신 결과 자신을 기르게 되지만 그것은 자신에 대한 은혜가 아니다. 성교의 결과 자녀가 태어나지만 그것은 물론 자녀에 대한 은혜로 여길 수 없다. —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모두가 생명의 긴 여정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니, 선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가 누구의 은혜를 입었는지 구분할 수 없다.” – 루쉰, <무덤>, [지금 우리는 아버지 노릇을 어떻게 할 것인가], 204쪽

“각각의 삶이 어떤 지나가는 현재라면, 하나의 삶은 다른 삶을 다른 수준에서 다시 취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철학자와 돼지, 범죄자와 성인이 거대한 원뿔의 서로 다른 수준에서 똑같은 과거를 연출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윤회라 불리는 것이다. 각각의 인물은 자신이 낼 소리의 높이나 색깔, 아마 가사까지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가사가 붙든지 곡조는 늘 같고, 음고와 음색이 아무리 달라져도 후렴(tra-la-la)은 늘 같아진다.” – 들뢰즈, <차이와 반복>, 1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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